5편: 전문가 시스템의 등장, 지식을 컴퓨터에 주입하는 법
- 공유 링크 만들기
- X
- 이메일
- 기타 앱
첫 번째 AI의 겨울은 차갑고 혹독했습니다. "인간처럼 범용적으로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겠다던 대담한 꿈은 처참하게 깨졌고, 연구비는 바닥났습니다. 학계는 깊은 무력감에 빠졌지만, 암흑기 속에서도 묵묵히 돌파구를 찾던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아주 현명한 역발상을 제안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상식과 능력을 기계에 다 집어넣으려고 하니까 실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범위를 좁혀서, 특정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가진 '지식'만 골라서 컴퓨터에 주입하면 어떨까?"
이 단순한 발상의 전환이 1980년대 인공지능의 화려한 부활을 이끈 '전문가 시스템(Expert System)'의 시작이었습니다. 현실의 복잡한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어도, 의사나 변호사, 화학자처럼 특정 영역의 정제된 지식만을 다루는 컴퓨터는 충분히 만들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지식 공학의 탄생: "만약 ~라면, ~이다"
이 시기에 새로운 직업이 탄생했습니다. 바로 '지식 공학자(Knowledge Engineer)'입니다. 이들의 역할은 인간 전문가를 찾아가 그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생각의 흐름을 낱낱이 인터뷰하고, 이를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규칙으로 변환하는 것이었습니다.
전문가 시스템의 핵심 구조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바로 전문가들의 지식을 모아둔 '지식 베이스(Knowledge Base)'와, 이 지식을 바탕으로 결론을 도출하는 '추론 엔진(Inference Engine)'입니다.
작동 원리는 우리가 흔히 아는 '조건문'의 거대한 집합체였습니다. 예를 들어 의료 진단 시스템이라면 다음과 같은 규칙들이 수천 개씩 얽혀 있는 구조였습니다.
규칙 1: 환자의 체온이 38도 이상(IF)이면, 열이 있는 것이다(THEN).
규칙 2: 환자가 열이 있고 기침을 한다(IF)면, 독감을 의심하라(THEN).
실제로 제가 이 시스템의 초기 모델을 처음 분석했을 때, 생각보다 구조가 단순해서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단한 자아나 지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짜놓은 거대한 규칙의 그물망 안에서 데이터가 흘러가는 구조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단순해 보이는 시스템이 가져온 파급력은 엄청났습니다.
세상을 놀라게 한 최초의 성과들
가장 대표적인 성공 사례는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개발한 '마이신(MYCIN)'이라는 의료 진단 시스템이었습니다. 마이신은 혈액 감염증 환자의 상태를 입력하면, 지식 베이스를 바탕으로 균의 종류를 식별하고 알맞은 항생제를 추천해 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마이신의 진단 정확도는 약 69%에 달했습니다. 이는 해당 분야의 비전문 의사들보다 높은 수준이었고, 감염증 전문의들의 적중률(약 80%)을 턱밑까지 추격한 수치였습니다. 컴퓨터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의료 판단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전 세계 산업계가 다시 들썩이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성공작인 '디센드(XCON)'는 디지털 이큅먼트 코퍼레이션(DEC)이라는 컴퓨터 회사의 주문형 컴퓨터 부품 구성을 자동으로 설계해 주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이 시스템 덕분에 회사는 매년 수백만 달러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장난감 세계를 벗어나지 못해 외면받았던 AI가 드디어 대기업의 돈을 아껴주고, 현장에서 실질적인 '수익'을 내는 도구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시 찾아온 낙관론과 숨겨진 균열
전문가 시스템의 상업적 성공으로 1980년대는 AI의 두 번째 황금기를 맞이했습니다. 기업들은 앞다투어 '전문가 시스템 구축 부서'를 신설했고, AI 전용 하드웨어를 만드는 회사들이 증시에 상장하며 주가가 폭등했습니다. 다시 한번 "이제 정말 인간의 지능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장밋빛 전망이 언론을 장식했습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축제 속에서도 조용히 치명적인 균열이 생기고 있었습니다. 지식을 컴퓨터에 직접 주입하는 방식은 태생적인 한계를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 전문가의 머릿속에 있는 미묘한 직관과 수십 년간 쌓인 노하우를 전부 'IF-THEN'이라는 딱딱한 규칙으로 문장화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게다가 규칙의 수가 수만 개로 늘어나자, 규칙끼리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이 생겼을 때 시스템 전체가 마비되는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한 분야의 '지식'만 넣으면 끝날 줄 알았지만, 세상의 지식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입니다.
핵심 요약
1980년대 등장한 '전문가 시스템'은 특정 전문 분야의 지식을 규칙(IF-THEN) 형태로 컴퓨터에 입력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의료 진단 프로그램 '마이신'과 상업적 설계 프로그램 'XCON'이 큰 성공을 거두며 AI 연구는 두 번째 황금기를 맞이했습니다.
인간의 전문 지식을 완벽하게 규칙화하는 것의 한계와 규칙 간의 충돌 문제가 대두되면서 또 다른 기술적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편 예고
전문가 시스템이 불러온 열풍은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한번 차가운 현실에 부딪히게 됩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론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찾아온 '두 번째 AI의 겨울'과 매칭 기술의 한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 공유 링크 만들기
- X
- 이메일
- 기타 앱
댓글
댓글 쓰기